성장[:]독서노트/사회-정치-비평

[헤어곽의 도서관] 독서후기 2023-02.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Herr.Kwak 2023. 10. 31. 16:00
반응형

 

- 책 소개 -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해야 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그런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바람은 그리 커다란 욕망이 아닐 것이나, 이만큼을 바라기에도 한국 사회는 그리 녹록지 않다.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오래된 문화 풍토는 늘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도록 하면서도 눈치껏 튀지 않고 적당히 살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사회생활’이라 여긴다. 조직 또는 관계로 얽히고설킨 것이기에 그런 풍토로부터 웬만해서는 쉽사리 벗어나기조차 어렵다. 그러하기에 한국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기란 어렵고 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23년간 법관 생활을 해온 문유석 작가가 문제적이라 진단한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사회·문화를 때론 신랄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 이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 탐색해본다.

 

- 작가 소개 - 

 


소년 시절, 좋아하는 책과 음반을 쌓아놓고 홀로 섬에서 살고 싶다고 바랐을 정도로 책 읽기와 음악을 좋아했다. 1997년부터 판사로 일했으며 2020년 법복을 벗고 사임했다. 책벌레 기질 탓인지 글쓰기도 좋아해 법관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틈나는 대로 기록해왔다. 칼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로 전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대본을 직접 맡아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개인주의자 선언』 『미스 함무라비』 『쾌락독서』 『판사유감』이 있다.

(* 해당 책 소개와 작가 소개는 인터넷 YES24에서 참고하였습니다.)

 


 

독일에 거주하고, 독일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한국의 전체주의와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개인주의의 차이였습니다. 자칫 잘못 바라보고, 잘못 오해하면 참 정 없다고 느끼기 쉽지만, 그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 친절한 그들이 있음을 지금에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유석 판사님, 아니 문유석 작가님이 이야기하는 한국사회에 필요한 "개인주의자"들은 정녕 지금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품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처음에 책의 제목을 인지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도대체 책의 내용과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찾는것이 힘들었습니다. "개인주의자"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 모든 내용과 그 중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고, 그 사회 안에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잘 살아내는,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들과 잘 타협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님이 이야기하는 개인주의자의 개념과,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개인주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모든이들이 공감할, 아니 직장인으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이 바로 한국의 수직적인 직장관계, 그리고 전체주의 문화일 텐데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군대와도 다를 바 없는 "상명하복"의 직장생활을 견뎌온 4050들에게 요즘 MZ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금 MZ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뀌고 있고,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조직과 그 조직 내에서의 서열의 중요한 한국 사회문화 속에서 내가 중심이 되는 개인주의는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기주의와 연계되고, 쉽게 혼동하기 마련이죠. 그러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시작점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님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개인주의자"로써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작가님은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자들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본인밖에 모르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던 민주주의의 작동의 기반이 되는 존재라고 말이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본인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그러하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바로 개인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이기주의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타인도 나와 동일한 개인으로,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해주기 때문에, 개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과 영역을 존중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죠. 바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의 표본일 것입니다. 때문에, 군대문화와 유교사상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별종 취급을 받는 개인주의자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집단의 불화를 이끌어내는 존재들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건강한 집단을 만들어내는 존재들입니다.

 

이거, 글을 쓰다보니 동일한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자에 대해서 짧게 언급을 마저 하고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개인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합리적인 개인주의자"가 되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흑백으로 갈라져 진영논리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있는 정치, 과잉된 교육열과 대학입시만을 위한 교육이 되어버린 입시, 그리고 그로 인한 학벌로 차별되는 사회. 이러한 고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바꾸기 위해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해와 편견 없이 그저 하나의 개인으로서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하고, 존중해 주고, 연대하는 문화 속에서 개별적이지만 다양하고 즐거운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즐거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일 것입니다.

 

미국의 배우 릴리 톰린은 이런말을 했습니다. "나는 ‘왜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을까?’ 늘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내가 바로 그 누군가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누군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을까를 궁금해하기보다, 내가 먼저 그러한 사람이 되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고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작가님의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들을 다시금 상기하며 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9)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 북적대는 술집 같은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생각일 뿐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그저 저 별에서 저런 과정을 거쳐 자란 인간들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뿐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평화로운 공존과 타협의 시작일지 모른다. (9)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10)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14)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16)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17)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 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20)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22)
영화 “위플래시”의 교수는 비밥재즈의 창시가 찰리 파커가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드러머 조 존스가 형편없는 연주를 한 그를 향해 심벌즈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 (25)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26)
원래 행복의 원천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집단주의사회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 때문에 오히려 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31)
법조인이라는 직업은 나라는 존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법조 내에서 한 줄로 서서 경쟁하고 낙오할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취미를 같이하는 동호인들, 함께 봉사하는 이들, 작지만 다양한 여러 사회 내에서 누구든 필요한 존재, 인정받는 존재로 살 수 있다. (52)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 통제형 자기 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56)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57)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간다. – 황현산 선생 (문학평론가) (58)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그래서 노동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60)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언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원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64)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66)
우리가 서로에게 ‘말’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무신경하게 휘둘러대는 대신 조금만 더 자제하고 조금만 더 친절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 (67)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76)
특기가 노력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누구든 응원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노력뿐 아니라 결과로써 능력을 증면했는데도 기회를 박탈하는 시스템은 분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80)
기업과 자본주의는 사회를 미래로 끌고 나가는 엔진이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브레이크가 없으면 자기 자신도 원치 않는 파멸로 달려갈 수 있다. (93)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끌린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동료 인간이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기계가 발전해도 인간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일 수 있다. (93)
불편하다는 이유로 실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반대로 실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98)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다. 어릴 때부터 잘하든 못하든 뭔가를 책임지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하고 못한 부분은 감싸주고 격려하는 문화가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을 만들어낸다. (129)
일반인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양적 지표보다는 결과의 끔찍함 정도, 자신의 지식 범위 밖에 있는 미지의 정도,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 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133)
[에필로그]
집에 있는 애들 생각이 나서 복잡한 시장통을 걸어 명물 기름 떡볶이를 한 움큼 샀다. 그런데 등 뒤로 한 여자분이 뛰어가며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윤아, 윤아” 그러다 한 신사분과 부딪혔나 보다. "죄송합니다. 아이를 잃어버려서요. 죄송합니다.” 그러곤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내 새끼 줄 떡볶이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떠올렸다. 이 범상한 무심함 때문에 우리가 잃은 것들을 말이다. 뒤늦게 나는 시장통을 뛰어 쫓아갔다. 아이가 멀리 가지 않았기를 속으로 빌고 빌었다.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는 떡볶이집들을 지나고, 도시락을 든 채 반찬을 골라 담는 사람들을 지나, 시장통이 끝나는 곳에 그 여자분이 인형같이 자그만한 여자아이를 꼭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애를 찾으셨네요. 다행이에요.” 여자분은 환하게 웃었다. “네, 고맙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반응형